삶을 위한 형태
Written and photographed by Seungyeon Yoo (@u_win365), a Rarefied Seoul contributor.
빈티지 시계를 왜 좋아하게 된 걸까.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명확한 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까르띠에를 좋아하던 평범한 시계 애호가 중 하나였다. 우연히 본 영상 속 산토스의 실루엣에 매료되어 시계라는 세계에 발을 들였고, 한동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Cartier Basculante 2405 (left) / Cartier Santos Medium (right)
그런데 점점 더 많은 시계를 접하면서, 내 기억에 남는 시계들은 어느새 항상 빈티지였다.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돌아보니 나는 이미 빈티지 시계의 세계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여기에 끌렸던 걸까. 한 사람의 취향은 결국 비슷한 결을 공유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빈티지 시계에 끌리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내가 이미 오래 좋아해오던 건축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디자인, 그리고엔지니어링
사람들이 가지는 건축에 대한 이미지는 크게 디자인으로서의 건축과 엔지니어링으로서의 건축으로 나뉜다.
디자인으로서의 건축은 건축가의 천재성이나 작가성이 드러나는 하나의 작품으로서 건축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자하 하디드의 비정형 건축물들처럼, 형태 자체를 강한 조형 언어로 밀어붙이는 시도들은 이러한 흐름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건축은 결국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이고, 아름답고 감각적인 형태는 분명 중요한 가치다.
Frank Gehry, Guggenheim Museum Bilbao, 1991–1997 (https://www.guggenheim-bilbao.eus)
그리고 엔지니어링으로서의 건축을 떠올리는 사람들에겐 건축은 공학적 산물로 다가온다. 리차드 로저스와 렌조 피아노의 퐁피두 센터처럼, 구조와 설비 시스템 자체를 건축의 언어로 드러내는 시도들은 이러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며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구조와 형태를 가능하게 만드는 공학적 성취의 결과물인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이루는 마천루들과 정교한 커튼월 시스템들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다. 건축은 결국 실제로 지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공학적 완성도 역시 떼어낼 수 없는 요소다.
Richard Rogers & Renzo Piano, Centre Pompidou, 1971–1977 (https://www.centrepompidou.fr)
결국 살아가는 것
그러나 건축을 오래 바라볼수록, 나는 점점 이것 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떤 지점이 존재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세상에는 멋있고 대단한 건축물이 정말 많다. 하지만 그중 일부는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는다. 감각적인 형태나 기술적 성취가 주는 ‘멋있다’는 감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공간들이 있다.
빛이 시간에 따라 달라지며 바닥 위에 긴 그림자를 남기는 복도, 창문의 높이가 절묘하게 맞아 앉은 사람의 눈과 바깥 풍경을 이어주는 방, 동선이 자연스럽게 사람을 특정한 장소로 이끄는 계단. 이러한 순간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설계자가 그 공간에서 살아갈 사람을 먼저 상상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건축의 본질에 더 가까운 가치는 어쩌면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산다는 것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 이해가 디자인의 이유가 되고, 엔지니어링을 통해 실현되며, 그 안에서 실제 삶이 펼쳐지고 이야기가 쌓일 때 비로소 건축은 완성된다.
Louis Kahn, Esherick House, 1959–1961 (https://www.philadelphiabuildings.org)
그리고 이상하게도, 내가 빈티지 시계에서 끌렸던 지점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손목시계 역시 디자인과 기술력이라는 기준 위에서 가치가 매겨진다. 현행 리테일 시계는 같은 레퍼런스라면 동일한 디자인과 동일한 무브먼트가 사용되고, 그에 따라 동일한 가격이 책정된다. 누구도 여기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하지만 빈티지 시계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같은 레퍼런스라도 컨디션과 에이징, 그리고 그 너머의 맥락들이 가치를 달리 만든다. 누가 이 시계를 찼는지, 어떤 경로를 거쳐 지금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건들, 그리고 시간이 남긴 흔적들. 빈티지 시계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품을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며 만들어낸 이야기, 그리고 그것이 쌓일 수 있는 시간. 이것은 시계가 상자 속의 물건이 아니라 실제로 누군가의 손목 위에서 삶과 함께했을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Universal Genève Polerouter
살아감이 전제된 디자인
그리고 어쩌면 이 ‘살아감’에서 비롯되는 가치는 단순히 시계에 후천적으로 덧붙여지는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느끼는 좋은 디자인이라는 감각 자체에도 이미 그 흔적이 녹아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알바 알토는 핀란드의 짧고 낮은 햇빛을 평생 붙들고 씨름했다. 비푸리 도서관의 천장에 뚫린 둥근 채광창들은 그 결과다. 직사광선이 아니라 부드럽게 확산된 빛이 공간 전체를 채우도록, 각도와 깊이를 집요하게 계산한 끝에 나온 형태였다.
루이스 칸 역시 마찬가지였다. 살크 연구소를 설계할 때 칸이 오래 고민한 것은 과학자들이 하루 중 어느 시간에, 어떤 빛 아래에서 사유하게 될 것인가였다. 그 고민은 콘크리트의 두께를 결정했고, 중정의 비례를 만들었으며, 바다를 향한 수로의 위치까지 결정했다.
이 건물들이 지금 보아도 여전히 ‘좋다’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처음부터 그 안에서 살아갈 사람의 삶을 상상하며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Alvar Aalto, Viipuri Library, 1927–1935 (https://www.alvaraalto.fi)
Louis Kahn, Salk Institute, 1959–1965 (https://www.salk.edu)
그리고 이는 빈티지 시계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빈티지 시계는 시계가 실제 생필품이던 시절에 만들어졌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는 행위 자체가 필요했던 시대였고, 그렇기에 디자인에는 자연스럽게 ‘사용’과 ‘삶’에 대한 고민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케이스 크기는 과하지 않고, 다이얼은 읽기 쉬우며, 각 요소들은 필요한 만큼의 비례 안에서 정리되어 존재한다. 무언가를 과시하기보다 실제 사용을 전제로 다듬어진 형태. 그 절제가 지금 보아도 이상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Girard-Parregaux 1791
사는 것(Living) 에서 사는 것(Buying)으로
하지만 기술이 발전하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그램 빌딩의 유리 커튼월 역시 이러한 변화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철과 유리, 그리고 기계 설비의 발전은 이제 건축이 더 이상 특정한 기후나 생활 방식에 강하게 종속되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다. 건물은 점점 더 높아지고 시스템화되었으며, 빛과 공기, 온도와 같은 환경 조건들은 건축 외부가 아닌 내부 시스템 안으로 끌어들여지기 시작했다. 충분한 기술과 에너지만 있다면, 이제 사람은 거의 어떤 형태 안에서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Ludwig Mies van der Rohe, Seagram Building, 1954–1958 (https://www.archdaily.com)
손목시계 역시 비슷했다. 제작 기술의 발전은 이제 어떠한 형태로든 시계를 만들 수 있게 해주었고, 스마트폰이 시간을 확인하는 기능을 가져가면서 시계는 점점 필수품에서 기호품과 사치품의 영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디자인을 둘러싼 고민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사람이 사는 것(Living)에 대한 고민에서, 사람이 사는 것(Buying)에 대한 고민으로.
케이스는 두꺼워지고, 사이즈는 커지며, 다이얼은 더 화려해졌다. 적어도 나의 눈에는,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보여지고 소비될 것인가에 가까워진 결과처럼 보인다. 이 변화는 형태의 인상 자체를 바꿔버렸고, 그것이 내가 현행 시계 앞에서 느끼는 미묘한 거리감의 정체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이 오늘날의 시계를 무조건 부정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시대가 달라진 만큼 시계의 역할과 디자인 역시 변할 수밖에 없다. 다만 내가 빈티지 시계 앞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끌림을 느끼는 이유는, 그 안에 여전히 ‘삶을 위한 디자인’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Longines Spirit 37mm (left) / Vintage Montilier watch (right)
우리가 결국 찾는 것
그리고 어쩌면 지금 시대 역시, 다시 이러한 가치들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고민과 사용의 흔적을 시간이라는 매개로 담고 있던 것들이 빈티지라는 키워드로 대표되어 몇몇 분야에 국한된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장르를 초월한 하나의 거대한 선호를 만들어냈다.
최근 건축계에서 프리츠커 상을 받는 건축가들의 흐름을 보아도 비슷한 변화가 느껴진다. 과거에는 강한 작가성과 형태적 혁신을 보여주는 건축가들이 주목받았다면, 최근에는 지역의 기후와 재료,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더 깊게 고민하는 건축가들이 점점 더 주목받고 있다.
프랑시스 케레 같은 건축가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의 건축은 거대한 형태적 제스처보다,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환경과 공동체의 삶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에 더 가까이 닿아 있다.
Francis Kéré, Léo Surgical Clinic and Health Centre, 2012-2014 (https://www.kerearchitecture.com)
빈티지 시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단순히 기존의 멋있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오래된 물건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진 삶과 시간의 흔적을 직감적으로 읽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우리가 빈티지 시계에서 발견하게 되는 매력은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그것은 누군가의 삶을 전제로 만들어졌고, 실제로 삶 속을 통과하며 흔적과 이야기를 축적해왔다는 것을 느끼고 이해하고, 또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